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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산책
Jan 3, 2014 19:06:42 GMT
Post by Admin on Jan 3, 2014 19:06:42 GMT
일상에서 느낀 묵상이나 인터넷 상에서 발견한 유익한 글들을 올릴 곳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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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산책
Jan 3, 2014 19:22:53 GMT
Post by Admin on Jan 3, 2014 19:22:53 GMT
제목: 달빛사랑
장거리 출장을 다니다 보면 본의(?) 아니게 새벽기도를 하게 됩니다. 지금 이곳 홍콩시간은 새벽 3시경 입니다.어제 16시간 직항비행기를 타고 무사히 이곳 홍콩에 도착했습니다. 캐나다 북부를 지나 북극을 경유해 시베리아, 중국을 지나 홍콩을 오는 데 북극 근처와 시베리아 상공에서 비행기가 몇 번 요동을 쳐 약간 긴장했습니다. 요즘은 출장 다닐 때 MP3플레이어를 꼭 가지고 다니는데 마음이 소심해 질 땐 역시 찬송가가 최고라는 것을 실감합니다. 비행 중 롤로코스터를 타는 듯한 상황이 발생할 땐 찬송가 듣고 풍랑아 잔잔하라고 명하시는 예수님 생각하고 나의 믿음 적음을 되돌아 보고 있으면 되면 대개는 상황이 지나가 버립니다. 그러면 이제는 명랑한 복음성가를 들으며 긴장되었던 마음을 풀게 됩니다.
장거리 비행이라 무언가 읽을 것이 필요해 가지고 간 책이 2년 전에 사두었다가 제대로 읽지 않은 교황 베네딕토님의 미래의 도전들이라는 책이었습니다. 오랜 비행 덕분에 읽지 못했던 부분을 다 읽게 되었는데 책 말미에 빌립에게 예수님이 나를 보면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말씀을 가지고 이야기되는 부분이 나오는데 잠시 이를 가지고 떠오르는 저의 생각을 책 뒤에 적어본 것을 여기에 옮겨봅니다.
아주 옛날에 중동의 한 지방에서 한 아이가 태어나 사람들과 하나님 보시기에 사랑스럽게 커가고 있었습니다.그는 어릴 적부터 신앙심이 남달라 예배당에서 종교지도자들과의 신앙담론에도 참가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장년이 된 그에게 커다란 하나님의 권능이 강가에서 세례를 받는 중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먹고 사는 문제, 세상의 욕심에 관한 문제 그리고 절대자 하나님의 바라보는 마음의 문제를 가지고 크게 고심하다가 이를 모두 극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점차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을 체득하면서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 되어감을 인식하십니다. 드디어 그분은 자신이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고 있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자신의 인성과 신성 사이의 갈등이 존재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본인은 자신의 인성이 엄청난 신성의 힘 앞에선 어쩔 수 없음을 확신하게 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고 실천하는 길로 생을 삶아가게 됩니다. 때때로 자신의 인식과 삶을 남들은 어떻게 바라보는 지 궁금하시기도 하여 본인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물어보기도 하셨습니다. 그 중 자신의 속마음을 바로 잘 드러내는 베드로라는 사람은 당신은 사람이 아닌 신의 아들이며 우리가 믿고 기다린 구원자입니다 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듣자 그 분은 갑자기 자신의 소명이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가고 있음을 느끼고 커다란 두려움도 느끼셨습니다. 구원자가 될 길이 어떤 길일 줄을 그분 은 아시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말도 안되고 억울하기 그지 없게 본인의 생명을 내 놓아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그분은 인식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말라고 엄하게 베드로에게 일침을 가합니다. 자신의 생명에 종말이 다가옴을 느끼는 예수의 인성은 그 것을 두려워 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써는 저 깊은 심연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가 있어 그는 그 것을 받아들일 각오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본인과 하나라고 믿고 따르던 하나님이 결정적인 순간엔 본인과 분리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자 엄청난 두려움과 혼란에 빠져 산에 올라가 밤이 새도록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합니다. 오죽하면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수 차례 기도부탁까지 했겠습니까? 하지만 드디어 그는 생사의 두려움 조차 극복하게 되고 또한 하나님이 자신에게 명하시고 계시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그 구원의 비밀을 받아들이게 됩니다.아마도 그분은 그분과 하나이신 하나님이 왜 저 무지한 사람들을 위해 죽어야 하는가가 엄청난 딜레마가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사랑의 하나님과 정의 하나님 사이에서 엄청난 갈등이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여하튼 길은 결정 났고 아니 이미 그렇게 예정되어 있음을 그는 다시 확인 하였을 뿐입니다.
어느 날 예수는 자기를 따르는 빌립에게 이야기 합니다. 나를 본 것이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내가 어느 날 산에서 너희들에게 이야기한 그 팔복을 주시는 하나님, 병들고 아픈 자를 치료하시는 하나님, 배고픈 자를 배불리 먹이우시는 하나님, 악한 심령을 쫓아내시는 하나님, 생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자신을 인간으로 낮추어 그들의 자녀로 일으키시는 하나님, 심지어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어 놓으시는 길을 찾으시는 하나님…그 하나님을 내가 너희에게 보여주고 있노라고.. 예수님은 자신의 삶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과 뜻을 우리에게 드러내고 실천하고 있음을 드러내십니다. 저 멀리 어느 우주에 은둔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너와 함께 실제 오늘의 삶 속에서 너와 함께 하심을 이렇게 보여주고 있노라고 주장하시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하나님을 바로 볼 것을 이야기 하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나는 이렇게 하나님을 드러내고 있으니 너는 하나님을 이제 보았느냐고. 내가 내 손가락으로 달을 바로 가리키고 있는데 정말 너는 나의 손가락 말고 저 달을 보았느냐고”
그리고 이 이야기를 저에게 적용해봅니다 “비록 달이 구름에 가리우더라도 그 달빛은 존재하듯이 이제 너는 정말 그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너에게 주시는 그 사랑을 느끼겠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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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산책
Jan 3, 2014 19:24:01 GMT
Post by Admin on Jan 3, 2014 19:24:01 GMT
제목: 야베스와 포레스트 검프
야베스의 기도문(역대상 4:9,10)을 가지고 다시 묵상하다가 느낀 것을 적어봅니다. 이 야베스의 기도문을 가지고 여러 사람들은 야베스가 기도응답 받은 것은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하였기에 하나님이 들어주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는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복과 지경 넓어짐을 기도한 흔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단지 이 기도문을 통하여 야베스는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고 복을 받더라도 하나님이 지켜주시기 않으면 복이 환란으로 바뀔 수 있음을 안 사람이어서 시작과 끝 모두를 하나님에게 의지한 겸손한 기도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구한 복과 지경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이 돌린 것인지는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기도를 들어주셨고 야베스를 그들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불리었음에 저의 관심을 끌게 됩니다.
개역판 한글성경에 의하면 야베스가 궁극적으로 원한 것은 복도 아니요 넓어진 지경도 아니라 결국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되기를 바랬던 것 같습니다. 그는 비참한 삶의 현실 속에서도 살아남기 원했을 것입니다. 더우기 축복받지 못한 환경속에서 태어난 그는 최소한 인간적 대접이라도 받기를 원했을 것이구요. 출생을 기뻐해줄 아버지가 없어 어머니가 이름을 지어준 태생적 고아였던 그는 그 어미에게 조차도 수고로히 난 자(원어 의미상 저주스런 느낌이 있다고 함)니 어려서부터 생계의 궁핍함과 주위 사람들의 시선에 힘들어하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인간적 복과 지경은 그의 목적도 관심의 대상도 혹 아니었을 수 있다고 추축해봅니다. 단지 그는 매일의 궁핍과 멸시에서 벗어나 허기를 면하고 한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구하지는 않았을까요? 그러기에 그가 구한은 복과 지경은 인간적으로 생각되는 커다란 재산과 영역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가 처음에 구한 것은 인간적으로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이 보기에는 정말 작은 물질과 인간적 대접이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비천한 자가 어느날 세도가가 되고 부자가 되었다하면 사람들은 그를 보고 존귀하다고 할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대개의 경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개천에서 용났다하거나 그놈 억세게 재수 좋네라고 이야기하기가 십상일 것이지요. 그것으로 존귀하다고 이야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욱이 전능자이신 하나님이 그가 주신 복과 지경으로 판단하여 수혜자를 존귀하다하면 넌센스일 것이구요. 하지만 성경 구절에서는 야베스를 형제보다 존귀하다고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무엇이 하나님보기에 존귀하다고 여겨지었을까요?
이런 가정을 하여봅니다. 야베스에게는 사소한 것이 다 귀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에게는 모든 것이 다 복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정말 그는 영육이 모두 가난한 자 였을 것이다. 특히 심령이 몹시 가난한 자였을 것이다. 야베스는 복과 넓어지는 지경을 구하여야만 했다. 그래야 최소한의 삶이 영유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오늘의 먹거리를 위해, 오늘의 생존의 힘과 위로를 위해, 그렇게 그는 매일 매일 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도응답이 그에게는 복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기도응답을 경험한 그는 신기해하며 또 기도할 수 있었다. 그래서 복에 복을 구할 수, 아니 구해야만 했던 것이다. 점차 그는 생존의 복에서 이웃과의 삶, 즉 생존에서 생활로 그 관심이 커가게 된다. 그에게 넓어진 지경은 지리적 지경, 사회적 명성일 수가 없었다. 그의 기도에 응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 마음속에서 자리잡은 감사의 마음, 사랑의 마음의 영역이 지경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를 천시했던 가정, 이웃과 사회를 향해 닫혀졌던 마음이 열어지고 그들을 향해나아가며 그들을 품을 수 있는 지경까지..
그는 영육이 철저히 가난한 자였을 것이다. 정말로 심령이 가난한 자였을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복을 주셨을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으며 천국을 볼 것이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야베스가 받은 가장 큰 복은 시련을 통해 낮아진 심령으로 천국을 보게된 복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삶을 평생 사모하며 기도하면서 개인의 생존의 문제를 넘고 가족, 이웃 그리고 사회의 문제를 넘어 하나님 나라로 가는 그러한 삶의 여정을 이 세상에서 보여준 사람이었을 것이라 생각해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다른 형제보다 존귀하게 여기시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야베스의 기도코드는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생각해봅니다.
예전에 구역예배 준비로 야베스기도를 생각하며 지내던 중에 유선방송에서 Forrest Gump란 영화를 보며 그 줄거리가 야베스의 기도내용과 너무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의 내용을 정리해보면… Forrest Gump는 야베스처럼 아버지를 모르고 살았다. 검프라는 이름이 바보 얼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지능이 낮은데다가 재대로 걷지도 못해 의족기구를 착용해다녔기에 친구들에게 항상 놀림을 받고 자란다. 어느날 친구들의 놀림을 피해 달아나다가 포레스트는 빠르게 달리는 소질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고등학교를 미식축구선수로 진학하게되고 나중에는 대학선수까지되어 전미대회에서 우승하여 케네디대통령까지 만나게된다. 이후 군에 입대하여 월남전에 참전하고 순찰중이던 전우가 포화속에서 죽게되었을 때 그들을 구해내는 공로를 세워 국가훈장를 받고 귀국후 닉슨대통령을 만난다. 그 이후 이어진 군생활중에 탁구에 천재적소질을 보여 중국선수들과 시합을 하고 유명세를 탄다. 제대통지가 나오자 검프는 신나서 고향에 있는 어머니에게로 달려간다. 고향집에는 탁구제품회사로부터 라켓과 옷들을 입고 회사를 홍보하는 댓가로 많은 돈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월남전에서 사망한 전우와 한 약속을 지키기위해 전우가 원했던 새우잡이어선의 선주가되어, 군대 상관이었던 댄준위와 함께 큰돈을 모은다. 물론 새우가 않잡히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댄준위가 시키는대로교회에 나가서 순수하게 기도하는 모습도 영화속에 삽입이 된다.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님이 시키는데로 하자 큰 수확을 올리는듯한 장면을 연상시키면서 바닷가에 큰 풍랑이 잃어난 뒤 엄청난 새우잡이가 계속되는 횡재를 하게된다. 그 과정속에 검프는 폐인이된 월남전 소대장 댄 준위에게 희망과 새삶을 그리고 죽은 전우의 가족에게는 부양의 은혜를 베푼다. 또한 병원과 교회를 세우고 필요한 사람에게 번 돈을 나누어주고 고향으로 돌아와 잔디깍기로 생활을 하면서 병중인 어머니를 간병하다가 임종을 지킨다. 검프에게는 어릴적 Jenny라는 여자친구가 있었다. 아마도 Jenny가 검프를 불쌍히여긴 마음이 검프에게는 어머니 이외에서 받은 유일한 인간적 대우이었기에 Jenny에 대한 검프의 감정은 애틋하고 사랑으로 커갔던 것 같다. 하지만 Jenny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찾아 검프는 안중에 없고 자신의 영육을 소진하며 명예와 돈을 구해 도시와 남자를 배회한다. 그러던 중 Jenny는 유명해진 검프를 발견하게되고 그를 찾아와 하룻밤을 지낸뒤 떠나버린다. 이후 검프는 미국을 횡주하며 동서남북으로 그냥 달린다. 3년동안.. 흡사 광야에서 시험을 받는 것처럼, 도인이 세상과 벗어나 도를 구하듯이.. 그저 길을 달린다. 소문이 TV를 타고 전해지자 그를 추종하는 이들이 나타나 함께 달리고, 검프는 도인처럼 여겨져 그가 무심코 던진말에도 감흥을 받고 이적을 맛보는 사람들조차 생긴다. 미국대륙을 홀로 무심히 그리고 쓸쓸히 달리고 있는 검프를 제니도 알게 된다. 검프를 다시 찾아와온 그녀는 그에게 검프의 아들이 있다는 것과 자신이 죽을 병(에이즈)에 걸린 것을 알리고 결혼을 요청한다. 검프는 그녀를 위해 아름다운 결혼식을 준비한다. 그리고 검프를 통해 새로운 삶을 찾은 많은 사람들이 하객으로 나타난다. 물론 댄준위도 그의 피앙새를 데리고 행복한 모습으로 검프를 찾아온다. 하지만 검프는 곧 제니를 떠나보내게되고 남은 아들(매우 똑똑한)과 삶을 살아간다. 버림받은 한 여인의 몸과 영혼이지만 자신의 순수한 사랑으로 이를 치유하여주고 평안의 안식을 인도한다. 그의 이름이 Forrest임을 생각나게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왠지 검프가 현대판 야베스가 아닌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태생적 괴로움, 어려움과 천대, 하지만 커가는 복과 복, 넓어지는 지경, 하지만 단순한 아니 미련하기조차한 삶 속에서도 얼마든지 피어나는 감동과 기쁨… 이 영화는 내게 추상적인 야베스의 삶을 가시적으로 구체화해주는듯한 느낌을 주며 성경는 나와있지 않는 야베스의 구체적 삶의 요소들을 추측하게하는 기회또한 제공하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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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산책
Jan 5, 2014 18:54:40 GMT
Post by Admin on Jan 5, 2014 18:54:40 GMT
제목: Wittenberg 방문기
토요일이지만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여행을 한다는 것은 설레임을 동반하기에 즐거움이 더해지는 것 같다. 가족 중 아무도 나의 여행제안에 관심이 없어 독일에 사는 동안 한번은 가보리라 다짐했던 곳인 Wittenberg를 출국을 앞두고 나 혼자만이라도 방문하기로 하였다. 아침 6시 반에 집에서 나와 7시 10분 열차를 타고 루터시 (LutherStadt)로 향하였다. 약간의 허기를 느껴 식당차에서 소세지와 감자요리 그리고 커피를 즐기며 차창으로 아름다운 봄을 즐기는 호사를 누렸다. 모든 것이 다시 솟아나는 봄에 루터도시를 방문하면서 나의 믿음도 새로이 샘솟기를 기대하면서...
시청 앞의 루터 동상, 슐로스키르헤(성교회) 앞문에 새겨진 95개조항 성명서, 루터하우스등을 찾아가며 사진도 찍고 기념품점에서 기념품도 샀다. 내가 다 가질까 아니면 좋은 사람에게 나눠줄까 약간의 고민도 하면서...슐로스키르헤(성교회) 안에 앉아서 이전에 마틴루터 영화에서 보던 장면을 연상하여 보았다. 가을연가 영화로 한국을 찾는 일본 대만 여인들과 경우는 다르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좋아서 찾는 마음은 별반 다를 것도 없는 것 같은데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신앙도 결국 마음이 문제 같은데.. 내가 내 마음을 주장하는 것이 옳은지, 주님이 주관하시기를 기도해야 한다고 하는데...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니고 마음자리를 훌훌 털어 버리고 놓아야 된다고 하는 분들도 계신데... 여하튼 루터의 하나종교적 열정을 느끼고 싶었다.
루터하우스에서 마틴 루터의 삶에 대하여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마틴 루터의 동상과 사진들을 보면서 그는 인자하고 멋있게 생긴 목사님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엄청 고집스럽고 심통 맞은 사람처럼 보인다. 하기야 엄청난 권위와 권력을 대변하는 로마 교황청하고 싸워서 이긴 사람이니... 그의 믿음에 대한 열정을 생각해본다. 그의 열심과 진실성....
루터 하우스에서 루터는 불쌍한 이들을 돌보며 함께 살았다는 것을 알았다. 재미 있는 것은 신부였던 루터가 결혼을 하면서 결혼의 이유를 설명한 글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믿음을 교회의 강대상에서만 주장하는 삶이 아니라 현실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일구어 나가려고 했던 것 같다. 면죄부 판매사건이 단지 로마교황의 새로운 교회건축목적 뿐만 아니라 각국 주교들의 로마와 경제적 커넥션이 결부된 것도 설명자료들을 통해 추측할 수 있었다.
작은 도시 비텐베르그에서 일어난 사건이 독일 그리고 전 유럽과 세계의 기독교인들에 미친 영향을 보면서, 삶의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그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소수의 정예가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교황청 대표들과의 논쟁 첫날 대답을 못하고 두려움과 분노 속에 있던 초라해진 모습의 루터가 하루의 시간을 요청하고 처절하게 기도하며 다시 담대해지고 자신의 믿음 속의 확신에서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는 이야기는 정말 한편의 드라마이다.
전시실 내에 무수한 루터 관련 서적들을 보면서 지금 독일의 기독교 상황을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컬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숫자는 문제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 세상 어느 작은 마을에서던지 루터가 그렇게 생명의 위험 속에서도 주장했던 믿음의 순수성과 은혜의 구원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알려고 고민하고 씨름하는 또 다른 루터가 있다면, 지금의 비워져 가고 힘없이 무너지며 더 이상 예배처소가 아닌 관광 명소가 되어버린 교회가 다시 기도하고 기쁨으로 예배 드리는 본래의 위치로 회복하는 날이 반드시 돌아오는 날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이런 저런 단상들을 뒤로하고 다시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혼자 여행 다녀온 것이 미안해서 시내의 꽃집에서 튜울립을 샀다.. 집사람이 좋아할까...
오른손엔 기념품이 들어 있는 가방, 왼손엔 아름다운 튜울립 한 다발로 마음이 넉넉한데, 오늘은 나도 멋을 내고 여행을 하여서 입성이 나쁘진 않았고 새로 산 착용감이 좋은 신발이 걸음도 편하게 해주었다. 시내 곳곳의 노천 카페에서 햇빛을 즐기며 아이스크림과 음료수들을 시켜놓고 따뜻한 봄을 즐기고 있는 멋쟁이 유럽사람들에게 내가 나를 자랑하고 싶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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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산책
Jan 5, 2014 19:07:59 GMT
Post by Admin on Jan 5, 2014 19:07:59 GMT
제목: State College 방문기
긴 주말을 이용하여 미국엘 다녀왔습니다. 저희가 살고있는 토론토에서 승용차로 약 6시간 주행거리에 있는 State College란 곳입니다. Pennsylvania State Univ.에 아이들 이모부가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간 캐나다에 와서 바쁘다는 핑계로 여행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가, 오랜만에 여행을 계획하니 마음이 조금 설레이기도 했습니다.
캐나다 국경을 넘어 버팔로시를 지나고 부터는 도착지까지 계속 산길로 이어지는데 토론토 주변에선 보기 힘든 풍경을 마음껏 구경하였습니다. 큰 산맥들이 보여주는 웅장함과 작은 구릉지대들이 보여주는 봄의 따스함 모두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살이 더부드러운 것이 외가 친척인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만나 서로 반가움을 나누었습니다. 독일서도 같이 살고, 북미에서도 그리 먼 곳이 아닌 곳에 함께 살게 된 것이 참 신기합니다.
처제네 집 뒷편에 시내가 흐르고 숲이 이어져 있어서 8시간의 장거리 여행 후 하루밤 단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니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가 어우러져 몸과 마음이 참 상쾌하였습니다. 풍경만 있으면 완전히 산사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제가 형부대접을 한다고 인근을 구경시켜주었습니다. Amish 마을을 잠깐 들려보았습니다. 길에는 마차가 다니고 사람들은 단순한 복장차림인데 남자는 수염을 기르고 밀집모자를 쓰고, 여인들은 머리에 하얀모자를 쓰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처음보는 사람이지만 그쪽에서 항상 먼저 샹냥하게 인사를 하여주었습니다. 인상들이 모두 선해보였습니다.
처재네 책장을 보니 이전에 독일서 먼저 귀국할 때 제가 건네 준 신앙서적이 여러 권 보였습니다. 반가워 제가 좋아하던 책들을 다시 꺼내어 읽어보았습니다. 그 중 몇 구절이 제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대상28:9)
“도의 길은 따지고 분석하는 데 있지 않다. 그저 온몸으로 부딪쳐 체득해야 하는 것이다. 수행자의 생명은 화두다….남이 방일 할 때 방일 하지 않고, 남이 잠잘 때 잠자지 않고, 쓸데 없는 소리할 때 쓸데없는 소리 하지 않고, 누가 보더라도 저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나 할 정도로 노력해야 한다. ….. 세속의 일도 자신이 하는 일에 푹 빠져야 거기에서 진수를 얻는 것인데, 하물며 도의 길에서야 더 무엇을 말하겠는가”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호10:12)
“무리가 마음을 다하고 맹세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저희의 만난 바가 되시고 그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 (대하 15:15)
내겐 필요없다고 생각해 건네준 책이 5년의 시간을 지나 다시 내게 다가왔습니다. 나를 부르시고 계신는 하나님을 다시 더 가까이 만나고 싶어졌습니다. 그리곤 만나질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처제네 방문길에 위싱톤을 들리려 계획했습니다. 금요일 밤에 도착해 하루를 쉬고 다음 날 출발하려 했는데, 날씨 관계로 일요일로 일정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일 예배를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음 속에 분명히 주일날 말씀을 통해 무언가 제가 받을 내용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자꾸들었습니다. 가족에게 양해를 구하였습니다. 다음 번을 약속하면서. 그리곤 백악관 구경 대신 교회에서의 예배를 선택했습니다.
아담한 작은 한인교회였습니다. 은퇴를 앞두신 목사님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내 가정이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약간은 진부한 내용을 가지고 가정주간의 설교를 하셨습니다. 귀에 못이 밖히도록 들은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이지만 나이드신 목사님이 열과 성을 다해 전하시는 열정에 그리고 무언가 얻고자 했던 나의 마음이 합해 제게는 은혜로운 시간이 되었습니다.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하게되었습니다. 자연스레 가족과 함께 하는 신앙에 대해 물어보는 시간이되고 저를 반성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제가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지내온 이 작은 혈연 공동체가 사실은 하나님이 주인이신 영의 공동체이어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제 주위를 다시 점검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육체적인 것, 지식적인 것, 영적인 것 모든 것에 제가 잠자고 있었다는 생각이 분명해집니다. 최근에 검도를 다시하면서 저의 육체적 한계를 분명히 느끼고 있습니다. 때론 근육이 마비가 되고, 발목이 삐기도하고, 조금만 뛰어도 숨이 목까지 차오르고… 그래도 이렇게 지켜주셨으니 그저 고맙기만 합니다.
처음 제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때, 아니 하나님이 저를 그렇게 찾아주셨을 때 그 때를 기억하면서, 신발끈을 동여 매고 이제는 제가 그 분을 찾으려 저 언덕 넘어 주님의 숲으로 달려가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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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산책
Jan 12, 2014 2:24:32 GMT
Post by 바람소리 on Jan 12, 2014 2:24:32 GMT
기독교와 목회자 김화일 2014-01-10 19:38:16
얼마 전(2013.10.2) 토론토의 ‘크리스찬 월드’신문에 실렸던 한국의 김진홍 목사가 쓴 ‘아침묵상’이라는 짧은 연재칼럼 가운데 한 부분을 소개하면서 나의 글을 시작하려고 한다. 나는 김진홍 목사가 캐나다에 들러, 1980년대 한국의 군사독재 반대와 민주회복을 위한 ‘토론토목요기도회’의 강사로 왔을 때 한번 만났었던 기억만 날 뿐 그 분이 어떤 목사인지 전혀 알지 못하지만 다음 글은 나의 평소 생각과 같은 동감을 준다.
“….이렇게 순수하고 착한 교인들을 우리 목사들이 겸손한 마음으로, 지극한 마음으로 섬기는 목회를 하여야 겠다는 생각이 절실해진다. 교회의 문제는 70~80% 이상이 목사의 문제이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목사의 마음 가짐에 따라 좋은 교회도 되고 그렇지 못한 교회도 된다. 교인들은 어차피 믿으려고 모인 교인들이다. 그러기 에 목사가 웬만큼만 진실하고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목회를 하면 좋은 교회로 성장하여 가게 된다. 그러나 요즘 젊은 목사들을 보면 공부는 많이 하였는데 가슴이 따뜻하지 못하고 겸손하지를 못하여 일어나지 않아야 할 갈등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기에 신학교는 지식으로 목회자를 기르려하지 말고 사람되는 교육을 먼저 사켜야 할 것이다.”
나는 목사와 목회자를 구별하여 말하곤 한다. 목회자는 목사들 가운데서 교회라는 공동체에 모이는 교인들에게 가장 크게 영향력을 미치고 따라서 기독교 전체의 질(바탕)을 좌지우지하는 종교지도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김진홍 목사가 윗글에서, “교회의 문제는 70~80% 이상이 목사의 문제”라고 말한 표현을, “기독교의 문제는 70~80% 이상이 목사의 문제”라고 고치고 싶다. 그만큼 목회자의 문제는 교회의 문제요 교회의 문제는 곧바로 기독교의 문제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며, 여기서 기독교라 함은 개신교를 말하는 것이고 기독교의 문제라 함은 기독교의 타락을 의미한다. 왜 목회자들이 이 지경이 되었을까? ‘목회자의 문제’에 대한 나의 짧은 개인적 소견을 밝혀본다.
첫째로, 아직 인간다운 인간이 되지 못한 목사가 목회자 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김진홍 목사는, “신학교는 지식으로 목회자를 기르려하지 말고 사람되는 교육을 먼저 시켜야 할 것이다."라고했는데, 이미 오래전에 히틀러 암살단에 가입했다가 사형당한 독일의 본회퍼 목사가 “사색적이고 지적인 신학훈련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신학적으로 사색하는 법만 알고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법은 알지 못하는 목회자를 양산한다.”고 했다. 나는 그의 ‘그리스도인답다’는 말과 ‘사람답다’는 말이 같다고 생각한다. 나는 목회자의 사람됨에 대한 글을 이미 우리 교회의 website에 올렸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냥 지나가겠다. (‘우리들의 이야기’의 39번, 제목 ‘人人人人人’을 참조할 것)
둘째로, 목회자들에게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소명(召命)의식’의 부재(不在)를 느낀다. 예수님은, “그러므로 예언자 다니엘이 말한 대로 황폐의 상징인 흉측한 우상이 거룩한 곳(마가복음엔, “있어서는 안 될 곳”) 에 선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독자는 알아들으라.) (마태 24:15)” 라고 말씀했으며, 성서에서 이를 ‘가장 큰 재난’이라는 제목을 붙였고 괄호 속에 “독자는 알아들으라”고 주의까지 주었는데, 나는 “황폐의 상징인 흉측한 우상”이 ‘소명의식 없이 강단에 선 거짓 목회자’를 가리킨다고 알아들었다. 소명의식 없는 목회자들이 기독교를 타락시키는 원흉이라는 말이다. 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의 타락만큼 큰 재난이 또 있을까?
보수신학을 따르는 목회자든 자유주의신학을 따르는 목화자든 그들은 설교에서 옳고 좋은 말만 한다. 그런데왜 기독교는 더 썩어가고 타락의 길로 가는가? 예수님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를 이어 율법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아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마태 23:2-5) “라고 했으며 또한, “그러므로 너희는 그 행실을 보아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 (마태 7:20)” 라고도 했다. 참, 어쩌면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종교상황을 이처럼 꿰뚫어 보고 계셨을까? 성경의 많은 이야기들은 역사적으로 또 은유적으로 읽어야 한다고 하지만 이 말씀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단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란 말을 개신교의 ‘목회자들’로 바꾸기만 하면 된다. 위에 인용한 예수님 말씀의 핵심은 ‘행실, 행위’ 이다. 즉 기독교인들은 물론, 특히 목회자들은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동아일보의 저널로그, ‘사막의 향기' 는 ‘한국 교회가 타락하게 된 7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가 “행동 아닌 말로만 전도했기에”라고 했다. 교회에 새 목회자가 부임하면 교인들은 Honeymoon 기간이 지나기도 전에 벌써 새 목회자가 어떤 사람인지 감을 잡는다. 내가 잘 알고 존경하는 한신대학의 김경재 명예교수는 오래전에 쓴 ‘소명의식과 공동체 영성’이라는 글에서,
“소명받아 목사의 길을 걸으려고 신학에 입문한 사람의 마음자세는, 겸손, 감사, 긍지, 기쁨이라야 한다….. 소명을 받은 것인지 아닌지는 영적이고 깊은 차원에서는 신비이며 하느님의 비밀이지만, 사람 편에 나타나 는 신앙적 체험현상은, ‘강렬한 거듭남’이다…..한 번 소명받은 자는 한 번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소명자가 철저한 ‘거듭남’을 거치지 않으면, 평생 목사직은 그의 영혼을 서서히 죽이는 무서운 ‘종교독’으로 작용 한다. 흔히 신학자나 목사처럼, 겸손의 말과 겉 행동을 거룩함으로 치장한 채 속에 위장된 최고의 교만이 그를 병들게 하는 직업도 드믈 것이다. 소명받은 자가 존귀하고 귀한 것이 아니고, 그가 위임받은 복음 진리 와 생명의 그리스도가 존귀한 것이다”라고 하며, 목회자가 ‘소명’ 없이 일하는 것은 목회를 해주고 호구지책을 삼는 것처럼 가장 비참하고 구차한 직업을 갖는 행위라는 내용의 말도 했는데, ‘먹사’라는 말이 바로 이런 목회자를 가리킨다고 생각하며, 예수님은 이를, “목자가 아니라 삯꾼(요한10:11-14)”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인간의 원죄를 교만이라고 말한 신학자가 있는데, 목회자들에게서 느껴지는 가장 보편적이고 큰 잘못이 바로 교만이라고 생각되며, 김경재 교수는 ‘최고의 교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김진홍 목사의 글에서도 ‘교만’의 반대말인 ‘겸손’을 3번씩이나 언급한 것을 볼 때 그분도 목회자의 교만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고 있는 것 같다. 나의 경험으로는, 보수적인 목회자는 교만을 위선으로나마 감싸고 있어서 겸손해 보이기도 하지만, 진보적인 목회자는 노출증에 걸린 젊은 여성처럼 교만노출증에 걸려 마치 교만을 용기나 자랑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과거 우리 교회의 어떤 현직 장로가 교인들 앞에서,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사람 있어? 목회자는 여자문제, 돈문제만 없으면 다른 잘못들은 덮어 줘야 돼!”라고 일갈했는데 과연 그럴까? 우리는 완전한 목회자를 바라는 게 아니라 김진홍 목사의 말처럼 “웬만큼만 진실하고 겸손한 마음 가짐”을 지닌 목회자를 바라는 것이다. 얼마 전 여러 친구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는 중에 토론토시의 Rob Ford 시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모두들 혀를 차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한사람이 불쑥, “요즈음 교회 목사들의 행동이 Rob Ford 시장의 행동과 다를 게 무엇 있습니까?”하여 대화가 잠시 얼어붙는 듯하다가, 모두 다른 교회에 다니는 부부들이지만 동감들을 표시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면 나머지 20~30%의 기독교(교회)의 문제는 어데서 생겨나는 것일까? 나는 평신도라고 일컫는 교인들에 게서 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옳은 게 좋다.”보다는 “좋은 게 좋다.”를 선호하는 교회생활을 하려 한다. 그것이 평화의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일반교인들의 몸사리기는 충분히 이해도 되니 그렇다 치고, 장로나 집사들이 당회나 제직회에서조차 원칙에 어긋난 문제인줄 알면서도 아예 언급을 회피하거나, 남의 눈치를 보아가며 ‘예’와 ‘아니오’의 손익계산을 하는 것 같다. 이는 소명의식 없는 목회자와 같은 것이라 생각된다. “엄한 부모 앞에선 맹종만이 미덕이다.”라는 서양(?) 속담처럼 “소명 없는 거짓 목회자 앞에선 맹종만이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동아일보의 저널로그, ‘사막의 향기’에서 ‘한국 교회가 타락하게 된 7가지 이유’ 가운데 다른 하나를 “교인들이 목사를 신격화하고 물질로 타락시켜서”라고 했으며, 목사는 하느님의 종놈이지 종님이 아니라는 속된 설명까지 붙이고 있다. 즉, 장로, 집사를 포함한 평신도들이 옳지 못한 일을 보고도 입을 다묾으로써 목회자의 교만을 극대화시키고 목회자를 신격화한다는 말로 이해된다.
이제 나는 한사람의 못난 평신도로서 기독교가 목회자 때문에 타락의 길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나름대로 두 가지 제안을 하고 글을 마치려 한다. 지금 목회자들의 두뇌는 점점 더 커져서 영악해지고 가슴은 싸늘하게 식어져서 이대로는 기독교의 회생(回生)이 거의 어려운 지경까지 다다른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데, 가르침만 가지고는 먹고살겠다고 덤벼드는 목회자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게 됐다고 생각되니, 어쩔 수 없이 천주교나 불교처럼 목회자들에게도 ‘제도적 장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주장의 핵심이다.
첫째, 목회자를 지망하는 사람은 천주교의 신부나 불교의 스님처럼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 (블교의 대처승의 삶은 모르기 때문에 비구승만 언급) 가끔 신부들이나 스님들의 비행이 언론에 폭로되기도 하지만 목회자들과비교할 바가 아닌 것 같으며, 기독교의 타락은 천주교나 불교에 대한 신뢰를 더욱 두텁게 한다고 생각된다. 수도원생활, 참선생활을 하며 계속 깊은 자기성찰과 자기극복, 영적으로 거듭나는 수행을 통하여 소명의식이 확고해지는 사람만이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소명의식의 확신은 자기 삶의 중요한 부분을 포기하거나 희생하면서라도 하느님으로부터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를 수행하겠다는 결심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목회자는 그가 목회하는 교회 교인들의 평균수입만큼만을 봉급으로 받아야 한다. 이렇게 할 때 목회자는 교인들과 어려운 삶을 함께하게 되고, 목회자의 물질적 타락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이 2가지 제안을 개신교가 받아들인다면 당장 목회자가 되려는 사람의 숫자가 2/3이상 줄어들 것이다. 이처럼 불가능하게 보이는 ‘제도적 장치’만이 20~30년 후부터 기독교가 다시 거듭나는 기사회생(起死回生)의 기적을 보여 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
목회자들은 자기 주장을 강하게 말할 때, 예수님의 “돌들이 외칠 것이다’”라는 말씀을 잘 인용하는 데, 나는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의 타락을 보면서도 계속 함구한다면, 소명의식 없는목회자들에게, “쓰레기나 오물들이 외칠 것” 같다.
기독교의 타락에 대한 나의 염려가 한 늙은이의 삐뚤어지고 속좁은 편견이거나 한낱 쓸데없는 기우에 불과하다면 얼마나 큰 다행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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